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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노트

생각의 도구, 노트

북트 윤현민 2017.04.23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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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적 행동이 가능한가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생각을 발전시키고 다듬어가기 위해서는 노트가 필요하다. 머리속의 생각을 펼쳐놓을 수 있고 그것을 빈 종이 위에 써가며 자유롭고 빠르게 연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트와 펜으로는 이 과정에서 느껴지는 어떠한 조작의 불편함도 없다.

머리속의 생각, 혹은 단어를 노트에 적는데는 불과 1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 과정은 너무나 익숙하며 자연스럽기 때문에 생각을 노트 위에 올려놓기까지 그 어떠한 부담도 없다. 과정 자체가 몸에서 나오는데로 그냥 하면 되는 행동일 뿐이다.

그러나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면서는 그렇지가 않다. 화면을 일단 열어야 하므로 버튼을 눌러야 되거나 지문을 인식해야 하거나 신경이 거기에 아주 잠깐이라도 쓰이게 되고 그러는 순간 이전의 생각을 놓치게 된다. 화면 열면서 방금 전의 생각을 잊어버린 경우가 적지 않다. 더군다나 지문 인식이라도 잘 되지 않으면 순식간에 그 상황이 머리를 지배하게 되고 비밀번호를 넣던가 다시 지문을 넣어야 해서 시간이 딜레이 된다.

일단 화면을 몇 초 안에 열었다고 해도 노트 앱으로 들어가는데 일정 시간이 필요하다. 앱이 어디에 있지 하면서 찾아서 열어야 하니까. 앱을 열면 로딩 시간도 잠깐 필요하다. 클라우드를 쓰면 조금 더 딜레이 된다. 그 다음 새 글쓰기 버튼을 눌러서 방금전에 생각한 것들을 적을 수 있는 빈 공간을 만든다. 이제서야 단어를 화면에 집어넣을 수 있게된 것이다.

행동 면으로 봤을 때 노트의 직관을 따라가기엔 스마트 기기가 갈 길은 아직도 멀다. 서피스나 아니패드 프로+애플펜슬을 빌려서 사용도 해 봤는데 또 다른 의외의 불편함이 더 많아서 내 행동 패턴에는 잘 들어맞지가 않는다.


펼친다. 그리고 적는다.

나에게 있어 오로지 생각에 집중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직까지는 노트뿐이다. 노트를 펴고 글자를 적는 것은 이미 뇌가 사고하거나 명령하지 않아도 스스로 처리하는 영역이므로 그 부분을 움직이기 위해 의도적인 명령이나 추가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집중하고 있는 생각을 적으면 된다.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적어나가고 그것을 풀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무의식적인 행동이 생각을 유지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생각이란 언제나 꺼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아 이거 정말 좋은 생각이야'라고 무언가가 머리속을 번뜩이며 지나가더라도 잠시 잠깐 한눈 파는 사이에 휘발되면 땅을 치고 후회한다. 다시 생각해 내는 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정리해서 확장 시키는데 나에게는 노트만한 것이 아직은 없다.

노트가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원하는 곳을 펼치는 것도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즉시 펼칠 수 있고 그리고 어떤 필기구를 써도 즉시 아무렇게나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기에서 느낄 수 있는 딜레이나 필기감으로는 그것을 재현하지 못한다. 설령 그런 필기감을 재현할 수 있다고 해도 노트의 앞 뒤를 뒤적이는 속도의 편리함과 직관은 아직 따라올 수가 없다.

그렇게 몇 년간 대여섯 권의 노트를 쓰고 있는데 이 과정이 반복될 수록 머리 속의 아이디어를 구체화 하는 경험이 더욱 좋아진다. 이것은 흔히 학교에서 필기하는 노트 정리의 개념이 아니라 생각을 있는 그대로 올려 놓고 마음대로 요리하고 주무르는 자유 연상에 가깝다. 나의 노트는 대부분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생각들을 펼쳐놓고 조립하는 과정으로 사용한다. 그런 용도이다.

앞으로 계속 얘기해 볼 내용이지만, 노트를 사용하는 것은 노트 필기와는 다르다. 그런 과정은 다음에 다시볼 요량으로 자료를 정리할 때나 필요한 것이지 생각을 구체화 하는 과정에서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노트를 쓰라고 하면 하나같이 강박증에 가깝게 왼쪽 위부터 차근차근 무언가를 적어 나간다. 생각을 연상하는 과정이라면 그것을 무너뜨리고 아무렇게나 막 적어가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생각은 머리로만 하기엔 너무 빨리 기억이 사라진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어떤 방식으로 결론이 도출되는지 생각의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좋은 결과로 만들어 내기가 어렵다. 이걸 단지 머리 속으로만 하는 것도 불가능 하다. 그래서 노트를 쓰는 것은 생각을 숙성시키고 구체화 시켜서 더 좋은 생각으로 만들어 나가는 시각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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